시급 무형문화유산"촌자밟기"발원지——제남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 태평가두 초가장촌

2022-12-03
출처:화동신문센터

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 태평가두에는 제남시 무형문화유산을 잉태한 촌락인 모초장촌이 자리잡고 있다.청나라 말기부터 마오초장촌에서 유행하기 시작한'촌자 밟기'는 마을 사람들이 즐겨 듣는 공연예술 형식이다. 2015년 4월 태평가두 마오자촌의'촌자 밟기'는 지난시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디딤돌" 의 흥기와 발전

1982년, 촌민 장희지는"촌자밟기"라는 민간공연예술형식을 접촉하기 시작했다."그 해에 나는 17살이였다. 당시 촌자밟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말할수 있다."장희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촌자를 밟는"본질은 희곡과 희곡의 유기적인 융합으로서 배우가 나무판을 밟고 공연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촌자밟기" 는 청조말기에 초가장촌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명절이 되면 촌민들이 공연하여 대대로 전해지기 시작하였다.후에 부녀자들의 전족풍조가 흥성함에 따라 당시 사람들은 널빤지를 작은 발과 흡사한 모양으로 고쳤다. 널빤지는 약간 비스듬했다. 배우의 앞발바닥은"작은 발"에 밟고 뒤발꿈치는 널빤지에 세워 붙였다."작은 발"의 땅으로부터의 거리는 원래의 10여센치메터에서 5~6센치메터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 배우들은"작은 발"에 밟는 연기가 더욱 령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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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전설이 촌자를 밟는 래원은 지난날 마을의 한 로선생이 황하이남에서 가르쳤다. 그는 3년의 시간을 들여 극본을 썼다. 그속에는 많은 원소가 포함되였다. 희곡도 있고 희곡도 있고 가사도 있으며 또 주화등 이런 류형의 극본은 주로 가정의 화목을 구현하는 공연이다."장희지의 회상에 따르면 1946년경에 이 선생이 쓴 극본은 아직 보존되여있었지만 80년대에 이르러 원서는 이미 분실되였다."로인들의 구술을 거쳐 촌자를 밟고서야 다시 뛰기 시작했다."2006년까지 여러 촌민들의 노력하에 이 드라마는 또 다시 정리되였다."최초의 책제목은"대소동왕가장"이고 우리 촌의 량로선생은"대소동왕가원"으로 고쳤다."장희지로부터 우리는 촌자를 밟는 극목에는 경극의 각종 배역에 대응하여"왕모는 로생이고 조큰누나는 청의이며 준각은 화단이고 어릿광대도 있으며 장님도 있고 대머리도 있고 절름발이도 있으며 재식하고 염불하는 사람도 있으며 전반 공연대오에는 대략 20~30명의 배우가 있다."올해 59세인 류맹오 서기는"촌자를 밟는 것"이 마오초장촌에서 한때 실전된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2004년, 우리는 인민대중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려는 정부의 호소에 호응하여 촌자를 밟아야 다시 모두의 시선으로 돌아왔다."

2015년 4월, 태평가두 모가촌의"촌자밟기"는 정식으로 제남시 무형문화유산명부에 올랐다."촌자밟기" 라는 무형문화유산을 더욱 잘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하여 모초장촌촌 두 위원회 성원과 촌민대표들의 상의를 거쳐 모초장촌의"촌자밟기"무형문화전시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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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자밟기" 무형문화전시관은 모초장촌 촌민위원회 대원내에 건설될 예정이며 면적은 약 50평방메터이고 내용은 황하문화와 시급 비유물프로젝트"태평촌자"를 주선으로 하며 마을개황, 지리환경,"촌자밟기"연원, 비유물전승자소개, 획득한 영예, 복장도구전시, 다채로운 회고, 미래 전망 등 8개 분야로 나뉜다.전시관은 구상이 독특하고 창의성이 참신하며 하이라이트가 두드러진 설계요구에 따라 공간척도와 표현내용을 결합하여 색채, 조명, 천장, 지면, 전시벽 등 건축장식에 대해 정밀화설계를 진행하고 창의주제를 두드러지게 하여 내용과 형식이 고도로 통일되고 강렬한 주제분위기를 조성한다.촌서기 류맹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을에는 주제전시관을 건설하였을뿐만아니라 전문적인 무용선생님을 초청하여 공연에 흥미가 있는 촌민들을 훈련시켜"촌자밟기"공연의 예술성, 전문성능이 전반적으로 제고되도록 할 계획이다.

현재,"촌자 밟기"공연도 점점 더 빈번하게 마오초장촌 촌민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고 있다. 양수무는 우리에게"설을 쇨 때 우리는 반드시 공연할 것이다. 때로는 단숨에 2월 2일까지 공연할 수 있다.최근 몇 년 동안 촌자 밟기가 마을에서 점점 더 유행하고 있다. 또한 점점 더 많은 촌민들이 우리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하고, 또 다른 마을이 우리를 초청하여 공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량수무 역시 자신의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는 우리에게 현재 촌자를 밟는 데 종사하는 대다수는 나이가 든 노인들이며 이 공연예술에 열중하는 젊은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지금 어디에 공연이 있는지, 아니면 우리 노인들이 호소하면 리허설만 하면 출전할 수 있고, 젊은이들이 따라 공연할 수 있지만, 전체 연극이 도대체 어떻게 편성되는지는 역시 우리 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촌자를 밟는"전승자로서 장희지는 이 무형문화를 전파하기를 매우 희망했다."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상대방에게 가르친다. 이 기예가 어디에 전해지든 발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만족한다. 이것은 나의 원칙이다."그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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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길을 벗어나 돈주머니를 부풀리다

촌민 량수무는 향의로서 우리에게"모초장촌"마을이름의 유래를 이야기했다."로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이 마을이 금방 존재했을 때 마을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큰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해에 큰 나무에서 초가 한그루 자랐는데 모초장촌은 이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올해 59세인 모초장촌지부 서기 류맹오는 1999년부터 소대장을 담임하기 시작했으며 2004년에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되였으며 2005년에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오늘날까지 류맹오는 여전히 모초장촌의 지부서기 겸 주임이다.류멍오는 이전 마을의 어렵고 낙후된 생활 조건에 대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과거에는 안 됐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식량이 부족했다. 가장 많이 먹은 것은 고구마였다. 과거의 길은 마을을 생각해내기도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벽돌, 기와 같은 것을 운송하려면 모두 트랙터, 트레일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2014년부터 모초장촌은 동서, 남북방향의 두가지 주요길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최근 몇년간 문화광장도 건설하였으며 2014년에 200여무의 비닐하우스를 건설하였고 2015년에 또 100무의 비닐하우스를 새로 건설하였는데 이 조치는 실제적으로 대중의 치부를 이끌어 촌민들로 하여금 볼수 있고 만질수 있는 수익과 리익을 얻게 하였다."우리는 또 태양광발전을 시작했는데 해마다 10여만원의 집단수입이 있었다."류맹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류서기는 우리에게 마을에서 금방 비닐하우스를 지을 때 확실히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주었다."만사가 시작되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다."그 중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충분한 토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인정과 걱정으로,"토지를 이전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을 참아 백성들과 마음을 터놓고 그들에게 산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일을 해야만 충분한 토지를 이전할 수 있다."현재, 하우스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빈곤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었고, 모두의 돈주머니가 점점 더 두둑해지고, 생활이 점점 더 희망이 있게 되었다.

모초장촌의 촌자는 여전히 계속 밟고있고 촌민들의 새로운 시대의 초요생활도 이제 막 출발했다. 모초장촌은"촌자 밟기"라는 무형문화유산을 전승해야 할뿐만아니라 특색을"밟고"행복을"밟고"행복한 생활로 통하는 치부의 길을"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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