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거리" 는 지난날의 휘황한 초집촌을 재현하여 치부의 길을 벗어났다——제남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 대교거리 초집촌 (상)

2022-10-21
출처:화동신문센터

초집촌은 제남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 대교동사무소 주둔지 서북 4공리, 308번 국도 북쪽 1공리에 위치해있으며 서쪽은 대장촌과 린접해있고 남쪽은 대오촌과 린접해있다.현재 초집촌에는 207가구, 785명이 살고 있다.




"부용가" 의 옛 번화

기록에 따르면 초집촌은 일찍 명조전에 촌민들이 거주하였는데 초씨촌은 민가가 많고 마을이 당시 2, 7을 만나면 대집이 있었기에 촌명은"초집"이였다.명나라 영락년간에 정씨, 장씨의 조상은 하북성 조강현에서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정씨가 많아 전 촌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사방팔방에서 재해를 입고 피난하여 온 리재민들이였다.초집촌중의 남북대로는 옛날에 남쪽에서 하구북쪽에서 하구까지의 관도로서 정부요원과 상인들이 이로부터 남하하여 북상하였는데 마을에 큰 집이 있고 관로 량측의 점포가 즐비하여 밤이 되면 등롱이 줄지어 매우 번화하고 떠들썩하기 때문에"부용가"로 불리웠다.력사적으로 정씨조상의 형제들은 다섯개로 다섯대로 나뉘였는데 정씨선조들이 북경에서 벼슬을 하였기에 일찍 그 민족사람들에게 면화를 재배하고 면솜으로 가공하여 조정에 보내어 관청에서 사용하게 하였기에"오대원면화점"이라고 한다.명말, 초집촌은 초가집이라고 하는데 역성현 작화로에 속한다. 명숭정의 ≪ 역성현지 ≫ 에는"초가집, 작산북십리, 동차왕장, 남오가장, 서남손가장"이 실려있다.청 중기에 초가집은 정북향 남회청 1리의 반에 속했다.건륭(乾隆)의 《역성현지(力城縣志)》에 "초가집(楚家集)이라 하고, 이칠일집(二七日集)이라 한다. 구지(舊志):작산북십리(<strong>雀山</strong>北十里)》"라고 하였다.1912년 ≪ 제남부력성현자치구구도 ≫ 에는"초집"으로 표시되였는데 력성현 마점향에 속한다.민국 ≪ 력성현지를 속수하자 ≫ 는"초가집"에 게재되였는데 력성현 마고향 남회청 1리에 속한다.

촌민 정성립은 올해 88세이다. 정성립은 젊었을 때 각지에서"소향"으로 지역을 나누기도 했다. 해방후 그는 소향에서 사업하였다. 1953년에 정성립이 정식으로 입당한후 향장으로 발탁되였다. 후에 소향에서 대향으로 고쳤다. 그는 또 기타 향으로 전전하면서 향장을 맡았다.정성립은 우리에게 현재의 초집촌의 면적이 이전보다 얼마나 큰지 모르며 원래는 거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4개 거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갓 해방되였을 때 전반 초집촌의 인구수는 500명도 안되였는데 지금은 800여명에 달한다."우리 이 거리는 5일에 한 집씩 장사를 하는데, 많은 장사꾼들이 이곳에서 노점을 차린다.어떤 곳은 식량 수확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집에 와서 작은 생계를 꾸려 직접 이곳에 정착했다"고 말했다.그래서 많은 외지인들이 마을에 와서 정착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태안, 비성 등 주변 지역에서 왔다.

1955년생인 촌민 왕옥승은 올해 66세로 마을에서 3기 문서, 2기 주임을 지냈으며 전기공, 교사 등 직업도 모두 종사했다.왕옥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초집촌에 대해 깊은 귀속감을 갖고있었다. 밖에서 아무리 잘 발전해도 집에 돌아가야 한다. 평소에 이웃간에 서로 도와주고 촌민간관계가 모두 좋으며 마을의 인간미가 아주 짙다.

요리로 부자가 되는"초집"상표가 주목을 받고있다

관련 자료의 기재에 따르면 초집촌은 일찍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서 촌내에 련합진료소, 신용사, 공급판매사, 구매소 등 장소를 륙속 설립했다.정문도는 우리에게 개혁개방후 초집촌은 국도에 가까운 이웃촌으로 이사했는데 70~80년대초에"천백년의 장터"인 초집촌은 여전히 황하북의 경제무역센터였다."많은 단위, 인민공사를 포함하여 모두 우리 촌에 있다."1977년 이후 각 단위는 잇달아 초집촌을 떠나 공사 주둔지인 대오촌으로 옮겼다.       

촌민 왕옥승은 일찍 황하를 건너 료리를 팔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료리를 가지고 강을 건넜는데 강가에 도착하면 먼저 줄을 서서 배를 탔다. 아침에는 어두컴컴했다. 배가장자리에는 또 계단이 있었다. 반드시 자전거를 마주쳐야만 올라갈수 있었다. 배에 오르면 뒤에서 기다렸다. 사람이 많이 올라야 배를 띄웠다."밤에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가로등 같은 조명시설이 전혀 없어 마을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더듬으며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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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이래 정부의 인도와 정책의 지원하에 초집촌은 토질우위자원을 충분히 발휘하여 채소생산을 초집촌 농업생산의 큰 하이라이트로 삼았다.1990년에 초집촌의 채소생산은 로천재배에서 비닐하우스로 승격되여 품종이 단일하던데로부터 겨울철채소, 여름철채소를 병종하는데 이르기까지 작은 산미나리, 상추공, 록채화 등 근 10개 품종이 있었다.2008년 8월, 대교진 익민채소재배전문합작사가 설립되였고 초집촌도"초집"표 채소상표를 등록하였으며 년말에 시, 구 2급에 의해 현대농업을 발전시키는 선진단위로 선정되였다.2010년에 근 30만원을 투자한 초집채소기지가 건설되였다.2019년, 초집촌의 채소재배산업은 이미 전 촌 200여명의 촌민들을 끌어들였다. 마을에는 채소비닐하우스가 60여개 있고 로천채소재배면적이 300무를 초과했다.현재 초집촌의 백무, 미나리, 토마토, 상추 등 7개 품종은 이미 국가록색식품인증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였고 촌의 년집체수입은 30만원에 달하였으며 촌민들은 치부의 새로운 길을 찾았으며 익민채소재배합작사도"제남시시범합작사","제남시특색농업생산기지"등 칭호를 수여받았다.

지혜와 용맹을 겨루고 온 마을이 힘을 합쳐 황하의 수해에 대처하다

올해 53세인 정문도는 공산당원으로서 2004년 10월 26일부터 초집촌에서 사업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거의 20년이 되였다.정문도는 우리에게 자기가 초중을 졸업한후 군대에 지원하여 입대하였는데 그때 이런 자원봉사를 세웠다고 알려주었다."만약 기회가 있으면 나는 입당하고 퇴역하면 마을로 돌아가 로소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자기가 배운 지식과 경험을 고향으로 가져가 백성들에게 복지를 마련해준다."

과거 초집촌 촌민들의 일상생활에는 전 촌의 행동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대사인 황하의 홍수방지가 있었다.촌민 왕옥승에게서 우리는 지난날 홍수방지의 계절이 되면 마을의 매 가구마다 건장한 로력이 생겨났다는것을 알게 되였다."마을에서 통지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즉시 출발해야 하니 지체해서는 안 된다.그때 홍수 방지 소식을 듣자마자 온 가족이 밤새 잠을 잘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장로력이 외출하여 순찰하면 녀성, 어린이, 로인들은 집에 있으면서 백양나무, 버드나무의 가지를 철사로 묶어 풀더미와 류사한 모양으로 묶고 시시각각 홍수를 막아낼 준비를 한다."우리 온 마을, 집집마다 이렇게 준비했다."

정문도는 80년대 중반에 황하에 큰물이 한차례 발생했는데 황하북의 모든 촌락은 모두 국가의 호소에 호응하여 인력과 물력을 배치하여 전선에 가서 홍수를 방지하고 홍수를 막았다고 기억했다.당시 황허댐은 수백 미터나 수천 미터마다 구간으로 나뉘어 다시 각 구간을 각 마을에 분배하여 정기적으로 순찰했다.정문도는"그때는 출근과 마찬가지로 낮에는 주간근무가 있고 밤에는 야간근무가 있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징을 가지고 가야 한다. 일단 한 사람 두 사람이 처리할 수 없는 어려움을 발견하면 징을 치고 경찰에 신고한다.이것은 우리 황허베이의 모든 남녀노소의 생명과 관계된다. 농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저녁에 촌민들은 마등을 들고 손전등을 치고 삽을 메고 튜브를 메고 황하땜을 왔다갔다하며 황하땜아래에 각 촌의 홍수방지대원들이 주둔하고있는데 어떤 사람이 경찰에 신고한후 앞으로 가서 긴급구조를 하는데 그때 사람들은 홍수방지에 대한 중시정도가 아주 높았다.이 외에도 딩원타오가 기억에 남는 점은"그때 우리는 일만 하고 말을 많이 하지 못하게 했다. 사투리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밧줄이 풀렸다고 하면"개장했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 무서워서 황허구가 또 열린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점유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