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아래 뿌리내린 새로운 시대 아래 성장——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 최채거리 버드나무 점촌

2022-09-23
출처:화동신문센터

대류수점촌은 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 최채거리에 자리잡고있다.전설에 의하면 400년전에 대류수점촌이 이미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데 지금 이 산전수전 다 겪은 마을은 제남의 신구 동력에네르기전환출발구의"동풍"을 타고 고품질발전의 현대의 길로 나아가고있다.




상인들이 큰 버드나무에 운집하여 마을에 뿌리를 내리다

기록에 따르면 400여년전, 대류수점촌의 조상들은 하북성 조강에서 황하 서안으로 이주했다.선대들이 처음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황하는 여전히 지상하였다. 모래바람이 세고 홍수재해가 빈발하자 그들은 마을주변에 몇줄의 수양버들을 심어 모래바람을 줄이고 수토류실을 완화시켰다.대류수점촌 서기 주종강은 우리에게 옛날에 마을이 황하나루터에 접근하고 또 관로가 지나갔기때문에 점차 상업거리를 형성하여 주변의 경제발전을 크게 이끌었다고 알려주었다.부지런하고 지혜로운 대류수점촌 조상들은 관도 입구의 몇 줄의 대류수 아래에 찻집을 열어 상인들이 쉴 수 있도록 했다. 이대로 가면 남북으로 오가는 상객들은 이를 주점으로 삼는 데 익숙해져 찻집의 장사도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발달한 경제에 이끌려 이곳에 모여 살게 되었고, 마을은 점점 형성되었다. 수년간의 생장을 거쳐 조상들이 처음 심기 시작한 몇 줄의 수양버들도 무성하고 굵게 자랐다. 세 명의 성인이 손을 잡아도 가장 굵은 줄기를 껴안을 수 없었다. 버드나무 아래의 찻집도 현지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사람들은"버드나무 가게"로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올해 이미 85세의 고령인 촌민 장련화는 우리에게 마을의 로인들이"버드나무가 잘린후 말뚝을 남겼는데 삼방직기 3대가 나무그루터기에 놓여져있어 누구도 누구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알려주었다.

대류수점촌의 일찍이 번화하고 떠들썩했던 것은 이미 역사의 긴 흐름 속의 짧은 축소판이 되었다. 현재, 한 차례 이전을 거친 대류수점촌은 비록 이미 과거와 확연히 다르지만, 지난의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의 일원으로서, 이 역사가 유구한 촌락도 시대의 전진 발걸음을 바짝 따라가고 있다.

대류수점촌과 황하의"사랑과 증오의 원수"

황하에 대해 말하자면, 버드나무 가게의 촌민들은 그것에 대해 사랑하고 증오한다고 할 수 있다. 선대들은 황하 나루터를 오가는 상객들에 의지해야만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있다. 용솟음치는 홍수는 오히려 촌민들에게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장련화는 1957년에 군대에 입대하여 조선에 가본적이 있으며 1958년에 조선에서 철군한후 하남에 주둔하여 도합 6년간 군대에 입대하였다.그는 과거 황하가 자주 물이 불어났던 것을 기억한다. 매년 여름 홍수도 막아야 하고 홍수도 막아야 한다."여름에 우리를 소집하여 강가를 순시한다. 낮이든 밤이든 매 시간마다 한 바퀴 순시해야 한다. 때로는 피곤해서 안 될 때도 있다. 사람은 직접 제방에 엎드려 잠을 잔다. 비가 많이 와도 깨어나지 못한다."그러나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강물은 홍수를 일으키기 쉽다."강물은 70~80센티미터 깊이로 얼어붙을 수 있다. 우리는 얼음판에 구멍을 한 줄 부수고 구멍에 토사를 메워 얼음을 녹여 조각으로 된 얼음이 물길을 막아 강물이 제방을 무너뜨릴 위험을 증가시켜야 한다."촌민위원회 류학강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어느해에 황하의 물이 특별히 높이 올랐다. 대류수점촌이 황하와 비교적 가까웠기에 촌민들은 심지어 강물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당시 제방은 또 낮았다. 우리는 정말 황수가 제방을 무너뜨리는것을 두려워했다."범람한 황허의 물은 버드나무 가게 마을에도 굶주림과 가난을 가져다 주었다. 지상하 현상이 심해 강물이 자주 침수되어 땅을 담갔다. 장롄화는 우리에게 말했다:"과거 마을 북쪽 400미터 정도는 모두 알칼리화된 땅이었다. 무엇을 심어도 자라지 않았다.황하는 범람하자마자 땅이 모두 침수되어 식량을 전혀 거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수와 침수 재해뿐만 아니라 황하도 마을 사람들의 이동을 크게 방해했다. 황하의 물에 의해 통과되었기 때문에 버드나무 가게의 일부 경작지는 황하의 다른 쪽으로 분할되었다.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강 건너편에 가야 한다.류쉐창은 우리에게 이전의 황허에는 다리가 없었는데, 강을 건너기 위해 마을에 목선을 만들어 백성들이 탈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왕래하는 선박이 많아지면 자연히 나루터가 형성된다. 주위 마을의 촌민들은 강을 건너려고 모두 대류수점촌의 나루터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맞은편 기슭으로 통한다. 이는 대류수점촌에 새로운 생계를 꾸리는 길을 제공해주었다. 장련화는"그때 많은 촌민들은 손님을 운송하여 돈을 벌고 생활했으며 60년대에는 줄곧 인공으로 강을 건넜다"고 말했다.사람뿐만 아니라 화물을 운송하는 것도 대부분 선박에 의존해야 한다. 류쉐창은 그때 강에 배가 특히 많았는데, 그 수가 지금 길을 달리고 있는 자동차보다 많지 않았다고 기억했다."마치 자동차가 길을 빼앗는 것처럼, 그때도 시간이 좀 있으면 위로 달렸구나."배가 곧 기슭에 닿을 때까지 기다리자 배 위의 사람들은 모두 내려와 함께 돛대에 묶인 굵은 밧줄을 잡아당겨 배를 기슭으로 끌어올렸다."다른 동력이 없기 때문에 인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두들 나팔을 불러 배를 끌어올린다. 큰 힘을 들여야 배를 기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시대의 진보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페리가 황하 위에 나타났고, 인력과 풍력에 의지해야만 항해할 수 있는 목선은 점점 도태되었고, 강 위에 부교가 건설될 때까지 페리도 완전히 사라졌다.2005년 대류수점촌 부근에 마침내 부교가 건설되였다. 류학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백성들은 사실 배를 타는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배에 앉으면 바가지처럼 어슬렁어슬렁했다. 황하의 물이 불었을 때 우리 마을에서는 모두 맞은편 배의 돛대를 볼수 있었다. 다리가 있으면 백성들은 배를 타려 하지 않았다. 길을 돌아 다리를 걸어도 배를 타려 하지 않았다."대류수점촌과 황하의 100년간의 투쟁이 막을 내렸고 장기적인 환경정비와 끊임없이 완벽해지는 기초시설건설을 거쳐 황하는 마침내 포용하고 박애하는"어머니강"의 본색을 회복하였다.

버드나무 가게 마을은 현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1973년, 원래 황하제방하에 자리잡고있던 대류수점촌이 이전되였다. 비록 구촌이 홍수의 침범을 받았고 거리도 심하게 파괴되였지만 촌민들은 여전히 그에 대해 아쉬움이 가득했다.장련화는 당시 마을이 이미"거리는 거리가 아니며 집도 집이 아니다"고 기억했다. 이렇게 초라하고 악랄한 조건에서 촌민들은 여전히 이주에 대해 항거정서를 느꼈다."고향을 떠나기 어렵다. 우리가 지금 다시 이사하게 하면 틀림없이 여전히 이런 심정일 것이다."류쉐창도 마을 사람들이 텅 빈 새 마을로 처음 이사했을 때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가뜩이나 가난한 버드나무 가게 마을 사람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기억했다.

황하 기슭의 대류수점촌을 떠나 점차 현대화의 길로 들어섰다."부유해지려면 먼저 길을 닦아야 한다."국가정책의 지원과 대류수점촌 로지도자들의 노력으로 2004년에 마을은 마침내"촌촌통도로"를 실현하였다.저우쭝창 서기는 우리에게 그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에 비만 오면 마을의 도로가 질퍽거렸다는 것이다. 나가서 한 번 걸으면 신발과 옷에 진흙이 가득 묻을 것이다. 반드시 벽돌을 밟아야 물이 비교적 깊이 고인 구간을 통과할 수 있다.저우 서기는"그때 며느리를 찾고, 상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희 마을에 도로가 있느냐고 물었고, 도로가 없으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농담처럼 보이는 이 말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도로의 중요한 지위를 생동감 있게 반영했다.도로의 건설은 대류수점촌으로 하여금 편리한 통행조건을 가지게 하였을뿐만아니라 마을에 치부의 기회도 가져다주었다.마을 내 도로가 기본적으로 정비되고 마을과 마을도 도로가 연결되자 버드나무 가게 마을은 2009년부터 채소 하우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길이 좋아졌다. 바깥 차가 들어올 수 있고 우리 차도 나갈 수 있다."이것은 마을 경제 작물의 재배와 농업 발전에 좋은 기초를 닦았다.

어디를 가든지 고향은 버드나무가게 촌민들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특히 매년 음력설이 되면 집집마다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든 어떤 사업에 종사하든 마을로 돌아가 설을 쇠게 된다.주종강서기는 우리에게 마을의 풍속에 따라 정월 초하루가 되면 후배들은 집집마다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정오가 되어서야 온전한 마을을 참배하며 오후에는 촌민들이 황하변의 각 길목에서 종이를 굽는다고 알려주었다.장련화는 설을 쇨 때의 떠들썩한 장면에 대해"마을에는 대극을 부르고 등불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는데 창극은 정월 14, 15좌우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늦어도 2월 2일까지 계속 노래할수 있었다"고 생생히 기억했다.주종강이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게임은 친구들과 함께 마을 개울의 진흙을 뭉쳐 바닥에 던지는 것이었다. 겨울에 개울이 얼면 어른들을 찾아'나무 팽이'를 만들고, 얼음판에서'얼음 까기'를 했다."그때는 텔레비전 같은 것도 없었고, 이것만 했다."

주종강은 대류수점촌 서기를 담임한지 이미 4년이 되였다. 그에게서 우리는 마을에 현재 도합 179가구가 있고 경작지면적은 1200무 좌우라는것을 알게 되였다.저우 서기는 올해 대류수점촌의 토지 이전은 이미 60% 에 달했고, 백성들도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얻었다며"토지 이전의 수입은 자신이 농사를 지을 때보다 더 많지만, 일부 노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농사를 짓는 것을 견지하고 있다. 바로 어른들의 일부 정서이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항상 무엇이 적다고 느낀다"고 말했다.장롄화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발달한 의료기술과 완비된 의료보험정책이다. 이는 노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뒷걱정이 없게 한다."전에 병이 나면 볼 곳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현재 국가는 의료보험 방면에서 우리에게 상당한 우대와 보살핌을 주고 있다. 진찰할 곳도 없을 염려도 없다."

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의 일원으로서 주종강 서기는 대류수점촌의 향후 발전에 대해 자신만만하다."우리 출발구의 건설은 웅안을 표시하고 포동을 학습하며 자신의 황하 특색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우리 마을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틀림없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점유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