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비바람 50년 빛나는 세월——제남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출발구 최채거리 손대촌

2022-08-11
출처:화동신문센터

손대촌은 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역의 최채거리에 위치해있으며 촌은 그 이름처럼 손대촌은 인정이 번창한 대촌이다.손대촌의 전 당지부 서기인 손수추는 올해 82세의 고령으로 1971년 취임부터 2021년까지 퇴직했다. 손수추가 재임한 50년 동안 손대촌에는 상상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재가 풍부하여 손씨 집안이 오래도록 견고하다

손대촌은 오래된 촌락이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영락년간에 손대촌의 선인들은 하북성 조강에서 력성현 손가진으로 이사했는데 약 청나라 초기에 손가진의 촌명은 손대장으로 바뀌였다."력성현 정북향 북회 청2리에 속하며 장터의 소재지이다."

역사가 유구한 손대촌에는 사당인 손씨가사가 숨어 있다. 청나라에 건설된 이 가사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이 되었다. 손대촌의 노인활동센터 작은 뜰에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북조남향이다. 정방과 동서편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는 회랑도 있다.산전수전 다 겪은 사당은 이미 디테일을 잃어버렸다. 다만 지붕우에 여전히 전통적인 양식이 보존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사당의 본채와 동서편방의 4처마각은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돌조각을 갖고있다. 벽돌조각은 대부분 기린, 매화, 까치 등 서상도안이다.사당 회랑의 동서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큰 비석이 있는데, 인위적인 파괴로 인해 비석의 문자는 대부분 흐릿하여 어렴풋이"강희 8년, 세사"의 필적을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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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민들의 눈에는 손씨가사가 조상들이 남긴 발자취이고 마을의 백년변천의 목격자이며 더우기는 손대촌의 뿌리와 근본이다.손씨가사에 대해 언급할 때 전 당지부 서기 손수추는 매우 자랑스러워했다."이 가사가 보존될수 있는 한 우리 촌은 예산을 내여 그것을 보수하고 확대할 계획이다."손씨가사는 비록 이미 300여년의 창상격변을 겪었지만 촌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의 형상과 지위는 오래동안 견고해졌다. 손수추는 우리에게"손씨는 우리 마을에 모두 4개 분지가 있는데 설을 쇨 때마다 각 분지의 후손들이 가사에 와서 절을 하고 절을 하는데 이는 이미 모두의 습관으로 되였다.»

명영락 연간부터 형성된 손대장 가문은 역사적으로 명인을 배출했다고 할 수 있다."손씨족보" 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5세 조손은 벼슬에서 병마지휘사에 이르렀다.8세 조손은 효를 멈추고 영평부 룡로현지현, 호부랑, 밀운병비도참의에 력임하였다. 9세 조손은 건종에 이르렀고 벼슬은 도찰원 우부도어사, 섬서좌포정사, 태복사경에 예속되였다. 11세 조손은 조상을 이어받아 남락지현, 만성지현의 번손은 중공, 시록은 중을 지냈다."인재가 많은 손씨가문은 전반 명청시기의 발전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손지효, 손건종 부자진사는 더욱 원근에 유명하다. 황제는 또 그들 집에 편액을 하사하여"부자가 같은 당에 7등과, 1씨 조손 3진사"라고 썼다.

손씨가문 선현들의 위대한 사적은 손씨후손들이 선배들처럼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근면으로 진정한 동량지재로 되도록 격려하고 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전환출발구역의 건설에서"손씨력량"을 이바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 사회주의현대화의 새로운 장을 엮는 과정에 손대촌에 속하는 독특한 필적을 남겼다.

채소로 부자가 되는 당지부 서기가 신천지를 개척하다

손대촌의 전임 당지부 서기 손수추는 올해 82세이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한 날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71년 5월 9일, 이것은 손수추가 입당한 날짜이자 이날부터 그는 정식으로 손대촌 당지부 서기직을 맡았다.1962년의 손수추는 여전히 인민교사였다. 이 해에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방학을 하고 마을로 돌아갔다. 손대촌으로 돌아간후 손수추는 빈곤과 량곡생산량이 극히 낮았기에 마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핍박에 의해 외지에 나가 생계를 꾸렸으며 마을에 남은 촌민들은 약간의 얇은 밭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릴수밖에 없었다는것을 발견하였다.그때 금방 결혼한 손수추는 집과 마을을 안심할수 없어 의연히 교원공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손대촌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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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손대촌은 혁명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손수추는 그중에서 상무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마을의 현황을 한층 더 똑똑히 인식하게 하였다.손대촌은 비록 4000여무의 토지가 있지만 대부분 투수통기성이 낮고 활성이 낮은 백토지로서 밀과 같은 토양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높은 세곡을 재배하기 어려우며 고구마, 수수 등 잡곡만 재배할수 있다.손대촌은 경제가 락후할뿐만아니라 많은 불안정요소도 존재하고있다."우리는 큰 마을이고 마을에는 20여개의 부동한 성씨가 있기에 그때 파벌, 가문이 매우 혼란하여 늘 어떤 사람이 싸우고 소동을 일으켰다."손수추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이런 현상은 결국 생활수준이 낮고 경제가 락후하여 초래된것이다."특히 공급량곡을 먹는 특수한 시기에 촌민들은 분배문제를 위해 모순을 일으킨 적이 적지 않다."

바로 이때부터 손수추는 마음속에 씨앗을 묻었다. 그는 손대촌의 가난하고 락후한 면모를 철저히 개변하려 했다. 그는 백성들이 안거락업하는 좋은 나날을 보내려 했다.1971년 5월 9일, 손수추는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원으로 되였으며 그도 즉시 손대촌의 당지부 서기로 임명되였다.당시의 손대촌은 가난하고 혼란스러웠다. 손수추는 마을의 현황을 개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잘 알고있었으며 한때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정서도 생겼지만 마음속의 신념은 그가 전 마을을 이끌고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지탱해주었다.

1975년, 손대촌 전체가 농토건설공사를 시작하여 토지를 깊이 뒤집고 평평하게 하며 수리를 건설하였는데 이 일련의 개조는 마을의 토지가 척박한 곤궁한 상황을 철저히 개변시켰다. 손수추는"그때부터 우리 마을의 식량생산량은 해마다 상승하였고 종래로 감산할 때가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손서기는"부유해지려면 먼저 길을 닦아야 한다"는 도리를 잘 알고있었다. 그의 노력과 촌민 및 관련 지도자의 지지하에 손대촌은 선후로 총연장 2294메터의 환촌아스팔트길, 3300메터의 촌북세멘트길과 800메터의 촌동세멘트길을 건설하였는데 이런 길은 마을과 외계를 련결시켜 촌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는데 량호한 기초를 닦아놓았다.개혁개방이래 손대촌은 산업구조를 적극 조정하고 토지와 교통자원상의 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남새비닐하우스를 중점산업으로 지원하여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350개 좌우로 신속히 발전시켰으며 남새재배면적은 60여헥타르로 전 촌의 가구당 만여원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2021년, 손수추는 퇴직했다. 그는 재임기간에 촌민들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헤아릴수 없이 많이 했다. 1992년에 촌급당안실을 건설했다. 그중 문서당안은 대중분쟁, 년령부실 등 문제를 해결하는 유력한 증빙으로 되였으며 전 촌의 조화와 안정을 수호하였다.2005년에 손대촌은 45만원을 투자하여 800평방메터의 촌정무경제무역종합청사를 건설하고 제북 손대슈퍼마켓과 제북 손대농용물자센터를 설립하였다.2008년에 마을 저압 전력망을 개조하고 농업 저압 선로를 건설하여 1300미터 농업 저압 선로의 가설은 대중의 전기 사용난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였다.2016년에 건축면적 1400평방메터의 성급규범유치원을 건설하고 북경교육팀을 특별초빙하여 운영관리를 맡았다.

손수추는 50년의 청춘과 분투로 원래 황폐하고 척박한 손대촌을 위해 빈곤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을 개척했다. 그는 실제 행동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자신의 쟁쟁한 맹세를 지켰고, 진정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면서 즐겁게 일하는 초요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손대촌의 50년은 간난과 영광이 병존하는 50년이고 분투와 광휘가 함께 있는 50년이다. 1986년부터 손대촌은 련속 3년간의 검수를 거쳐"문명촌"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 칭호도 지금까지 유지되고있다.이밖에 손대촌은 또 선후로"성급문명촌","제남시로령사업선진단위","제양현 초요건설선진촌"등 80여개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손수추 본인도 선후로 여러차례"로동모범","우수당지부서기","우수공산당원"으로 선정되였고 또 련속 6년간 시우수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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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전력으로 백성을 위해 새로운 시대의 바통을 이어받다.

2021년, 원 계획생육주임으로 있던 류서미는 퇴직한 로서기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당지부 서기로 당선되였다.류서미는 손대촌에 시집온지 이미 30여년이 되였다. 향의로서 2014년에 계획생육주임을 맡기 전에 29년간 의료위생사업에 바쳤다.근 30년간의 의사생애에서 류서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가장 인상깊은것은 열이 나는 아이를 진찰한적이 있다. 체온을 측정할 때 환자가 갑자기 고열로 쇼크되였다. 류서미는 마음속의 초조함을 참으며 아이를 위해 구급조치를 한후 병원에 호송했다. 그는 환자일가를 모시고 접수, 응급진료, 링거를 받았다. 저녁 8~9시가 되여서야 아이의 체온이 마침내 정상온도로 내려갔다. 그는 진정으로 안심했다.류서미는 다음과 같이 총화했다."나의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환자에게 두뇌열을 보여주는것이고 또 로인, 특히 만성병이 있는 로인에게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해주는것이다."

류서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가 부임한후 부딪친 첫 난제는 바로 손대촌유치원을 철거하는것이다.이 유치원에 대해 말하자면, 촌민들은 그것에 대해 매우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노서기 쑨슈추의 노력으로 촌민위원회가 출자하여 유치원을 건설했다. 방대한 부지면적과 규범화된 관리는 마을 아이들도 대도시의 교육 분위기를 누리게 했다.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제남의 신구 동력에너지 전환 시작구역의 완공은 손대촌에 각종 대형 공사의 흥기를 가져왔고, 유치원은 시공 과정의 장애가 되었다.거리 지도자의 협의에 힘입어 철거된 손대촌 유치원은 유치원을 직접 지켜본 유서미는 유치원이 철거되는 순간 눈시울을 적셨다.

백성들이 이주한후 류서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촌민들의 문화오락생활을 더욱 풍부히 하는것이다.손대촌은 줄곧 모내기를 돌리는 전통이 있었다."정월 12일, 3일부터 리허설을 시작하여 정월 15일이 되면 마을을 에워싸고 공연했는데 모두 매우 기뻐하고 또 매우 좋아했다."현재 백성들의 생활이 좋아지고 문화생활에 대한 수요도 자연히 끊임없이 높아지고 있다. 촌민들의 날로 늘어나는 정신문화수요를 확실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손대촌은 도서관을 건설하고 있으며 촌민들에게 헬스장을 제공하고 광장무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일상오락활동으로 삼고 있다.

류서미에게 있어서 로서기는 그가 일생동안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다. 그도 손수추처럼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하는 좋은 서기가 되려 한다. 촌민들을 위해 근심을 덜어줄수 있을뿐만아니라 제남의 신구 동력에네르기전환출발구의 정책리익배당금우세를 다그쳐 손대촌을 새로운 시대의 고품질발전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점유율